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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강감찬 장군 그는 고려의 구국의 영웅이며 귀주대첩의 주역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외세의 침입이 끈이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거란군의 침입은 고려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는데요.
이러한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를 구한 강감찬 장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감찬 장군

 

강감찬은 거란의 1차, 2차 침입때에는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고 조정에서 전쟁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어 조정으로 나갔습니다.

강감찬은 거란의 1차, 2차 침입때에는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고 조정에서 전쟁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1018년 요나라가 고려 현종이 입조하지 않았고 강동6주 또한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의 10만대군으로 고려를 3차 침입 합니다.
소배압은 1차로 고려를 침략때 왔던 소손녕의 형이었으며, 2차 침입때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었던 인물입니다.

 

거란이 침략해오자 당시 서북면 행영 도통사로 나가있던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어 거란군과 맞서게 됩니다.

이때에는 고려도 거란군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준비를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이끈 고려군의 숫자도 20만 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강감찬의 고려군은 전쟁터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홍화진에서는 산골짜기에 매복을 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후 대패하여 물러나는 소배압의 거란군을 추적하여 귀주에서 섬멸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 입니다.


당시 살아서 요나라로 도망친 거란군은 겨우 수천 이었으며,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합니다.
그야말로 고려군의 대승이었습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소배압의 낮가죽을 벗겨 죽이겠다라고 할 정도로 분노하였으며, 소배압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겨우 목숨만은 건져 파직 후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제3차 침입에서 대패한 거란의 요나라는 결국 고려와 평화협정을 맺게 되고 강감찬은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을 봉해지며 식읍300호를 하사받습니다.

 

후에 덕종이 즉위하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오르고 식읍1000호를 하사받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이후 84세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하였고 현종의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승리는 거란군의 침략 야욕을 잠재워버렸습니다.

이상이 고려 구국의 영웅 강감찬 장군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또 다른 역사 관련 주제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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