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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 고려 무심정권 첫 집권자

이의방

이의방 그는 고려 무신정권 첫 집권자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고려 무신으로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중 일인이며 무신 시대의 첫 포문을 연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는 피로 흥해 피로 망한 케이스인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의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의방 무신정변을 일으키다

 

이의방의 본관은 전주이며, 동생 이린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입니다.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이의방은 1170년 무신정변 당시 왕의 친위부대인 견룡군의 수장인 견룡행수였습니다.

 

 

그는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켰고, 의종을 몰아내고 의종의 친아우인 명종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이후 대장군 ·전중감 겸 집주에 임명되고 벽상공신에 정중부, 이고와 함께 책록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그는 동료이자 정변 주역인 이고가 자신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것에 불만을 품는것을 보고 그가 방비할 틈이 없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이고를 처단합니다.

 

이후 정중부와의 권력싸움에서 승기를 잡고 무신들의 통치기구인 중방을 장악하여 고려의 첫 무신 출신의 권력자가 됩니다.

 

1173년 문신 김보당과 살아남은 문신들이 의종의 복위를 내세워 난을 일으키자 군대를 동원해 난을 진압하였고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그해 10월 이의민을 의종있는 경주로 보냈습니다.
경주로간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를 꺽어 시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의민은 대대적인 역풍을 맞게되고, 조정의 여론도 악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1174년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이 공격해 오자 이들을 물리쳤고, 중광사, 홍호사,홍화사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이들을 죽이고 여러 절을 불사르며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이의방의 최후

이의방은 권력을 더 공고히 만들기 위해 좌승선이 되면서 자신의 딸을 세자비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일은 이의방의 발목을 잡게 되고 정치적 입장을 더욱 고립시키게 만들고 맙니다.

 

1174년 9월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윤인첨을 보냈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서경 출신 윤인미, 김덕신, 김덕재 등 여러 사람을 살해해 인심을 잃었습니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이후 최숙을 먼저 파견하고 직접 출진하였지만, 추위로 인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뒤인 1174년 12월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 의해 암살됩니다.
이때 그의 형 이준의를 비롯해 같은 세력인 고득원등이 죽었고, 딸인 태자비도 축출되고맙니다.

 

이의민은 친형 이준의와 함께 고려를 망친죄로 반역열전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그로인해 전주 이씨 족보에서 이름이 삭제 당했습니다.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은 이의방이 척살당한 후 전주로 도망을 갔고, 전주이씨 집안을 존속시켰습니다.
이후 이의방의 가솔들은 행여나 정중부와 정균이 자신들마저 처리할까봐 북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후 이의방의 가문은 북쪽에서 지지기반을 쌓아 결국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세웁니다.

 

고려와 이의방 가문은 어찌보면 악연인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무신정벼 1대 집권자인 이의방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봤을때 피로 흥한자는 피로 망한다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의방 다음 무신정권을 이끌었던 정중부에 대해 포스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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