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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중일전쟁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세계대전을 세계대전으로 칭하는 이유는 그 중심에 일본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관련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일전쟁(1937년7월7일)은 1931년9월에 있었던 만주사변과는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이에 중국 역시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으며 서방에서도 1937년 10월5일 루즈벨트가 격리정책을 선언하는등
본격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일본의 대규모 전쟁수행 의지가 담긴 전쟁이 바로 중일전쟁이었으며, 이에 서방측이 대응을 하였으며
이는 곧 태평양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습니다.

따라서 2차세계대전은 중일전쟁이 그 시발점일 것입니다.

그러면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중일전쟁 포스팅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일전쟁 발발하다

중일전쟁은 1937년7월7일부터 1945년9월2일 까지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쟁을 말합니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1931년 9월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만주사변을 통해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본토를 공격할 빌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작은 돌다리인 노구교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북경 교외 풍대에 주둔한 일본군이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실시하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나고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주력부대를 출동시켜, 다음날 새벽 노구교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이때 행방불명되었던 병사는 용변중이었고, 20분 후 대열에 복귀했지만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위한 조작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관동군 및 본토의 3개사단을 증파하여 북경·천진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결국 이 작은 사건을 조작해 전면전으로 확대가 되었고 중일전쟁이 시작됩니다.

북경과 천진을 점령한 일본은 상하이까지 확전을 시킵니다.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일본군에 점령당합니다.
난징을 점령한 5먼여 일본군은 무고한 시민 수십만을 아무이유 없이 잔인하세 살육했고 여성들을 강간했으며 주변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그들의 대량학살은 12월 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난징대학살 입니다.
이 학살로 정확한 숫자는 알수 없지만 대략 2~30만명의 중국인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도 수만명이 이르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일반인들을 성 외곽으로 끌고가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한꺼번에 여러사람을 죽였고,
총알도 아깝다며 사람을 땅에 묻거나 휘발유를 뿌려 태워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총검술 훈련을 하는가하면
누가먼저 일본도로 100명의 목을 자르는지를 내기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했습니다.

이들은 살인을 놀이정도로 생각한것입니다.
이렇게 희생당한 중국인들의 시체가 양쯔강에 둥둥 떠다녔다합니다.

 

 

이후 중일전쟁은

난징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이후 우한을 공략하고 광둥에서 산시에 이르는 남북의 10개 성과 주요 도시 대부분을 점거합니다.

이때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때였습니다.
중일전쟁이 진행되면서 당장은 일본의 공격을 막아내는것이 우선이라 판단을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본격적인 항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중일전쟁은 장기화가 됩니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의해 광벙위한 전선에서 일본군의 점령지는 도시와 도로 및 철도주변인 점과 선에 그쳤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군은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삼광작전 등의 잔학행위로 전쟁 전기간에 걸쳐 중국인 1200만 명을 죽였습니다.


살광[殺光] = 다 죽여
소광[燒光] = 다 태워
창광[搶光] = 다 뺏어

 

중일전쟁은 1938년 10월 일본에 의해 광주와 무한이 함락된 이후 중국 국민정부는 반격할 여력이 없었고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할 여력이 없어서 각 전선에서는 소모전만 이어지고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미일 협상중 일본군의 중국 철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 발발합니다.

그리하여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전이 되고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됩니다.
미국과의 전쟁 초반 기세를 올리던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참패를 당합니다.

이때 중국에는 105만이나 되는 대병력이 있었지만 이미 제2전선이 되어버린 중국 전선에 못박혀 제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1945년 9월 2일 미국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가 맥아더 자운 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며서 중일전쟁은 끝이납니다.

참고로 이때 시게미쓰 마모루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아나오는데, 이는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도시락폭탄의 파편에 맞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2차대전의 시작 중일전쟁 관련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궁금하셨을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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