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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육지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임진왜란 바다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위대한 육지의 충무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김시민 장군입니다.

진주대첩의 영웅인 김시민 장군은 일본군이 모쿠소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존재였습니다.

1592년 10월5일 일본장수 13명이 지휘하는 일본군 정규군 2만여명이 전략적 요충지인 진주성을 함락시키려 침입해왔습니다.

한산대첩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후방의 보급로를 확보해야했고, 전라도로 통하는 요충지인 진주성을 함락시켜야만 했습니다.

이때 진주목사는 김시민 장군이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은 선조11년인 1578년 무과에 급제했고, 임지왜란 직전인 1591년 진주 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당시 진주 목사가 아닌 판관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 이경은 일본군이 두려워 제 목숨 부지하고자 지리산으로 도망을 갔지만
거기에서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럴거면 차라리 싸우다 죽지...

이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의해 진주판관 김시민이 진주목사 직을 대리합니다.

 

 

장군은 일본군이 진주로 쳐들어올것을 직감하고 성곽수리 및 군사훈련을 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해 전쟁준비를 철저히했습니다.

진주대첩 당시 전력을 살펴보면 일본군은 2만의 대군이었으며 조선군은 민관을 합쳐 3800명이었습니다.
6:1 의 불리한 전투였습니다.

무기도 일본군은 최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을 하였지만 조선군은 활을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진주성도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수류탄과 같은 무기로 직접 투척할 수도 있었고 화포등을 이용해 쏠수도 있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은 조선군의 숫자를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부녀자들에게 남장을 시켰고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방어하였습니다.

7일동안 혈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6:1의 전력차이를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진주에서의 승리는 김시민 장군, 진주성 군사 뿐 아니라 의병들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경상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전라의병장 최경회, 김준민, 조응도의 의병 부대들이 일본군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 사수에 많은 힘을 보태었습니다.

 

 

이렇게 승리한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일본군 2만명 중에서 1만명이 사상되었고, 육지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전투 마지막날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적의 탄환을 맞아 사경을 헤매다 숨지고 맙니다.
이때 장군의 나이 39세 였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김시민 장군의 전사는 조선의 큰 불운이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그를 '모쿠소' 라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 일본 연극 가부키에 '모쿠소 호간' 이라는 악당으로 등장할 정도로 말입니다.

김시민장군을 모쿠소라 부른 이유는 진주목사의 목사를 모쿠소라 한 것인데
조선에 목사는 20여명이 있었지만 모쿠소는 김시민 장군만을 칭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일본군의 공포의 대상이
김시민 장군이었습니다.

그만큼 일본군에게 위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가부키에 '덴지쿠 도쿠베' 라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덴지쿠 도쿠베가 모쿠소의 아들. 즉 김시민 장군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조국의 복수를 위해 인도에서 배운 기독교 마법으로 일본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주인공입니다.
이것만 봐도 김시민 장군이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시민 장군의 필사항전은 그만큼 일본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김시민 장군의 호도 충무공 입니다.
김시민 장군이 일찍 전사하지 않으셨다면 바다의 충무공만큼이나 육지의 충무공도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을 것 입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김시민 장군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구국의 영웅이자 또 다른 충무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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