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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황산대첩

이성계

이성계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가장 먼저 떠오를겁니다.

왕의 이미지가 강해 그의 장수로서의 능력이나 업적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는 고려말 적, 원, 왜구와 싸워 승리했으며, 대회전에서 대부분 승리한 명장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고려말 활약, 황산대첩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성계 그는 누구인가?

이성계는 고려말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그의 활솜씨는 주몽과 비견될 만큼 신궁이었으며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조선 건국 후 기록이라 미화된 부분도 있지만, 그가 신궁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성계가 젊을때 정안옹주가 담모퉁이 까마귀 다섯마리를 보고 이성계에게 활쏘기를 청했습니다.

이성계가 활 한발을 날리니 까마귀 다섯이 한대의 화살에 다 꿰어졌다 합니다.

원 나하추 군대화 전투때 이성계에게 적이 화살을 날렸고, 이를 안 이성계는 말위에 올라서니 화살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말위에 선 이성계가 활로 반격해 적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성계는 신들린 활솜씨와 뛰어난 무공을 가진 불패의 장수였습니다.

 

고려를 괴롭힌 왜구

 

 

고려말 1350년 부터 40년동안 500회나 왜구가 침략해왔습니다.
매달 한번은 쳐들어왔다는 것 입니다.

왜구는 고려를 쳐들어와 약탈, 강간, 살인을했고, 고려 백성을 힘들게 했습니다.

1380년 왜구가 남도지방을 완전히 휩쓸었습니다.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은 임진왜란때를 능가했습니다.

수많은 고려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들이 지나간 곳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왜구를 토벌하러 출정하다

이에 고려 우왕은 이성계를 삼도 도순찰사로 삼아 왜구 토벌을 명합니다.
이성계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이성계가 사근내역에 도착했으나 벌써 배극렴 등이 왜구에게 패해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왜구는 다시 함양 일대를 도륙하고 남원으로 진격.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진 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남원에 이르자 왜구가 120리 밖에 진 치고 있었습니다.
고려 패장들은 이성계를 보고는 절하며 기뻐했습니다.

이성계는 하루동안 말을 휴식시키고 전투를 시작하려했습니다.
이에 부하들이 적이 험지에 있으니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좋다했습니다.
이에 그는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것은 왜구를 섬멸하기위해서다 어찌 그들을 기다려야하는가" 라며 진군을 명했습니다.

 

 

 

 

 

 

황산대첩

운봉을 넘자 왜구가 수십리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에 정산봉에 올라 지세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왜구가 본진을 습격할 것을 대비하고 군을 계속 진군시켜 적과 조우했습니다.

이성계는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한 후 공격을 명했습니다.

그는 백발백중 활솜씨를 자랑하며 싸웠습니다.
그가 20발의 대우전을 적에게 쏘니 이중 17발이 왜구의 왼 눈에 맞았습니다.
다시 유엽전으로 활을 쏘니 왜구는 이성계의 활솜씨에 전의를 상실하고, 산에 진을 펼치고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군사가 지치니 속전속결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병법에서 하책인 산아래에서 위의 적을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선봉에서서 적군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고, 전투는 격렬했습니다.

 


왜구의 수가 10배나 많고 지형이 유리했지만, 정공법으로 몰아부쳤습니다.
이성계는 야차처럼 공격했고, 왜구도 필사 응전을 하며 전장은 지옥으로 변해갔습니다.

피를 뒤집어쓴 이성계는 병사를 독려하며 적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말이 활을 맞아 두번이나 바꿔타며 적진에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가 칼을 휘두를때마다 왜구들이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던중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이성계는 화살을 뽑고 더욱 용감히 왜구와 싸웠습니다.

고려군은 그가 부상을 당한줄 전혀 몰랐습니다.
이성계가 선두의 적 8명을 죽이자 왜구들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이성계가 피투성이가 되어 분투하자 고려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했습니다.

이때 그는 적장 하나가 무예가 뛰어난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15~6세의 소년장수였으나 용맹하기 그지없었고 창을 휘두를때마다 고려군이 쓰러졌습니다.

그장수 이름은 아기발도.
이성계군은 그가 나타나면 일제히 피했습니다.
이성계는 그의 무예를 아껴 이지란에게 생포하라했지만, 이지란은 아군의 피해가 커 불가능하다 아뢰었습니다.

"그러면 목을 베라" 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아기발도가 목과 얼굴을 감싸고 있어 활을 쏠 틈이 없었습니다.

이지란은 활을 쏠 곳이 없다 보고했습니다.

"내가 투구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길것이니 그대가 즉시 쏴라" 라 하고 아기발도의 투구를 맞추었습니다.

그틈을 놓치지 않고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기발도를 명중시켜 죽였습니다.

 

 

왜구는 아기발도가 죽자 우왕좌왕했고, 이성계는 왜구를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왜구는 피하기 바빳고, 고려군은 그들을 대파했습니다.


이 전투가 황산대첩 입니다.

 

이 전투로 왜구의 시체가 골짜기 가득했고, 냇물이 붉어 6~7일간 색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려군보다 10배 많았던 왜구는 겨우 70명만 살아 도망쳤고, 이 전투에서 1600여필의 말을 얻었습니다.

이성계는 송도로 승전보를 올리고 개선했습니다.
그의 대승은 고려 조정을 승전무드로 바꾸었습니다.

이성계의 개선군이 돌아오자 최영은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 앞에서 영접했습니다.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라며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구국의 영웅이 됩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이성계를 환영했습니다.

고려 대 문장가이자 학자 이색이 시를지어 이성계의 승전을 치하하자 그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조선의 태조로 각인된 이성계는 불패의 무장이었으며,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조선의 태조이자 고려말 구국의 영웅이었던 이성계의 활약상과 황산대첩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고려를 왜구로부터 구했지만, 자신이 구한 고려를 직접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건국왕 태조가 된 그의 운명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번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또 다른 역사 관련 포스팅으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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